촛대는 무엇입니까?
날짜 : 2010년 7월 19일
제목 : 주님이 원하시는 바로 그 교회를위하여
설교자 : 김진명 목사
본문 : 요한계시록 2:1~7
앞으로 4개월후면 일산은혜교회가 창립된 지 만 11년을 맞이합니다. 지금까지 오는 과정에 많은 기쁨과 감격. 그리고 눈물, 고난이 있었습니다. 지난 주일 저녁 제직회때 재정보고한 것처럼 특별히 올해 상반기에 부채 1억 5천만원을 상환할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저희 교회를 붙들어 주고 계신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 교회를 보시고 어떤 평가를 해 주실까요?
사람이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혹은 세상이, 이 사회가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교회의 주인이신 주님이 오늘의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저는 올 여름에 세 번에 걸쳐 우리교회에 대한 주님의 시선과 평가를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그 처음 시간으로 에베소교회에 대한 주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교회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나누고 싶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나오는 일곱 교회는 당시 실제로 존재한 지역교회들입니다(ppt-소아시아의 일곱교회 지도). 7이라는 숫자는 완전함을 뜻하는 매우 상징적인 수입니다. 그러므로 일곱 교회는 바로 당시의 모든 교회, 오고 오는 시대의 모든 교회를 대표하는 교회로서 선택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서, 특별히 오늘 에베소교회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서 오늘의 우리교회를 향해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소아시아의 일곱교회는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슬픔과 기쁨, 성공과 실패를 체험하는 믿음의 공동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체적인 지역교회를 향해서 편지를 보내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먼저 주목해야 합니다. 지역교회에 속해 있는 것은 이 세상을 사는 성도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오늘날 많은 분들이 지역의 특정한 교회에 속하는 특권과 책임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래서 주일마다 이 교회 저 교회를 옮겨다니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익명의 교인에 머무르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시스템이 잘 갖추어진 대형교회에 쏠림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물론 부득이한 사정 때문에 다른 교회에서 예배드릴 수도 있고 또 교회를 옮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지속적으로 소속감 없이 방황하는 성도들은 심각하게 생각해 촛대는 무엇입니까?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구체적인 일곱 교회에 말씀하시는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지역교회를 소홀히 생각하는 것을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각자가 소속된 지역교회에서 주님을 신실하게 섬기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에베소교회를 향해 보내진 편지입니다. 에베소교회를 잘 알기 위해서는 당시 도시 에베소를 알아야 합니다.
에베소는 당시 로마제국에서 로마, 시리아 안디옥,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네 번째로 큰 도시였습니다. 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도시로서 아시아의 관문지역으로 아시아 첫째 가는 도시였습니다. 유럽과 로마로 실어나르는 동방무역의 주요 교통로였기 때문에 아시아의 시장이라고 불리는 대무역도시였습니다.
또한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도시로서 로마제국내의 몇 개 안되는 자유도시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중요한 도시로서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라고 불리는 아데미여신의 신전(로마식의 명칭은 다이아나신전)이 있었던 도시였습니다. 이렇게 온갖 종교와 마술이 성행하던 도시였습니다. 에베소는 정말 복음이 필요한 도시였던 것입니다.
본래 에베소교회는 사도 바울이 그의 제2차 선교여행(주후 52년경) 중 들렀고 제3차 선교여행중 선교전략상 이 도시의 중요성을 인지하여 이 곳에서 약 2년 반(사도 바울이 한 곳에 가장 오래 머물렀던 도시가 바로 에베소입니다.)을 머물며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전도함으로 시작되었던 교회였습니다. 이런 수고로 많은 영적 열매를 거두면서 에베소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3차 선교여행에서 돌아오는 촛대는 무엇입니까? 길에 에베소교회의 장로들과 매우 인상깊은 작별을 하는 장면(주후 57년경)이 사도행전 20:17~38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장면을 생각할 때마다 감동을 받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며 디모데를 이 교회의 지도자로 세웠는 데 초대교회 전승에 따르면 1세기말 다시 디모데가 이 곳을 떠나면서 사도 요한이 에베소교회의 지도자가 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에베소교회는 그런 의미에서 특히 이 편지를 받고 있는 사도 요한에게는 의미가 있는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를 개척한 뒤에 디모데에 이어 사도 요한 자신이 목회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이 에베소에서 목회를 했으며 노년까지 거기서 가르쳤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에베소교회는 사도 요한과의 각별한 인연을 맺고 있는 교회였습니다. 에베소교회가 세워진 지 약 40여년이 지난 후(믿음의 1세대후) 이 편지가 주어진 것입니다. 아마도 에베소교회를 언급할 때 사도 요한의 가슴은 더욱 뛰었을 것입니다.
교회, 에베소교회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그 분은 누구입니까?
1절에 ‘오른손에 있는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 라고 말씀합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바로 앞 절 1장 20절 에 설명이 나와 있습니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교회’ 입니다. 곧 일곱교회의 사자를 붙들고 있는 분입니다. 교회의 사자는 목사, 장로, 감독 등 초대교회의 지도자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각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설교하며 다스리고 목회를 책임진 사람이 여기 일곱 별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 사역자들을 오늘도 붙들고 계시는 분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목회자는 주님의 손에 붙잡힌 목회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목회자가 주님의 손에 붙잡혀서 사역하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목회자에 대한 합당한 존경과 기도의 지원은 성도들의 마땅한 바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또한 주님은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분’ 입니다. 교회를 항상 돌아보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교회의 주인은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습니다. 그의 교회에 속한 우리들은 그 분의 통치 아래에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절대적인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주님은 교회를 알고 계십니다. 사실 그 분만이 교회에게 칭찬과 책망의 말을 하실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오늘도 교회의 지도자를 붙들고 계시며 교회를 돌보고 계십니다.
물론 교회에 대한 사람의 평가도 귀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에 대한 세상의 평가도 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주인되신 예수님의 평가가 가장 정확한 평가입니다. 예수님의 평가에 겸손히 청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실까를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교회에 대한 사람의 평가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까? 아니면 주님의 평가에 더욱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까?
또 우리는 신앙생활하다가 어떤 사람의 말 한 마디에 그저 주저 앉아 버리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말씀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뭐라고 하실까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 분은 다 아십니다. 주님은 모든 성도들이 한 일에 대해서 주님은 인정하시고 그것을 칭찬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2~3절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 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 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 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 을 아노라”
첫째, 주를 위해 끊임없이 행한 여러 가지 봉사 행위 , 달리 말하면 그들의 복음전도를 위한 지칠 줄 모르는 수고 였고, 그런 와중에서의 희생과 손해를 감수하며 주님의 간섭하심을 기다린 인내 였습니다.
둘째, 바른 신앙의 교리를 지키는 모습 이었습니다.
사실 에베소교회는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던 초기부터 많은 박해와 시련을 겪었습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바울의 전도로 다이애나 신전 주변에서 여신의 우상신상을 만들어 팔던 상인들이 생계의 위협을 받자 사도 바울과 그리스도인들을 격렬하게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은 위축되지 않고 여전히 복음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았고 전도하고 인내했던 것입니다.
거기다가 에베소교회는 이단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교리적인 촛대는 무엇입니까? 확신 위에 굳게 서 있었던 것입니다. 자칭 사도라는 하는 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6절에 보면 ‘니골라당’이라는 이단의 무리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들의 행위를 미워했습니다. 신학자들은 이들이 본래 예루살렘교회의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인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중심으로 한 무율법주의적 방종에 빠진 무리들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에베소교회는 이런 방종을 단호히 거부했던 것입니다. 에베소교회는 좋은 지도자들, 곧 사도 바울, 디도데, 사도 요한 등의 기라성 같은 지도자들의 가르침 속에서 바른 기독교 교리를 붙잡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에게, 우리에게도 여전히 필요한 부분입니다.
저희 교회는 그 동안 사회봉사와 장애인선교에 꾸준히 봉사를 해 왔습니다. 섬기는 여러 기관에서 이렇게 지속적으로 봉사하는 교회가 없다고 할 정도의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이 일에 계속 헌신하고 수고하신 성도들을 주님이 아십니다. 주님이 기뻐하실 만한 일입니다.
또한 안정적 성장을 하는 가운데 지난 5년전에 영혼구원하여 제자삼는 일에 집중하기 위하여 가정교회로 전환하고 오늘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전환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참으로 많은 댓가를 지불해야만 했습니다. 함께 신앙생활했던 여러 성도들이 떠나는 것을 지켜 봐야만 했습니다. 교회가 지금 잘 성장하고 있는 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는가 하는 질문이 있었지만 주님이 교회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그것은 영혼구원하여 제자삼는 일입니다.)를 붙잡아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여러 희생과 손해를 감수했던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주님의 칭찬이 있을 것이라 저는 믿습니다. 감사하게도 올해 조금씩 그 열매를 보고 있습니다. 올 상반기 등록한 새가족의 90%가 처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라는 것은 바로 그 댓가를 지불하고 견디어 온 교회의, 여러분의 수고의 열매라고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동안 저희 교회는 은사주의적 신앙생활을 지양해 왔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사모하지만 은사만이 신앙생활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의 말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잘못된 교리, 이단과 사이비신앙을 경계해 온 이런 부분 역시 우리 교회가 주님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에베소교회에도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당시의 에베소교회가 많은 칭찬을 받았지만 주님의 책망이 필요했던 치명적인 한 가지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가벼운 책망이 아닙니다. 촛대를 옮길 것이라는 무서운 주님의 경고가 담긴 책망입니다.
4) 에베소교회의 책망
에베소교회의 책망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처음사랑, 첫사랑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4절입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First Love)을 버렸느니라”
인간의 모든 사랑은 변할 수 밖에 없는 연약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뜨거운 첫사랑도 식을 수 있습니다. 에베소교회는 사도 바울이 공개적으로 감사를 표현할 정도로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엡 1:15~16)을 가지고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1세대를 지나면서 에베소교회의 주님 사랑, 성도 사랑도 그렇게 변질되어 간 것입니다. 핍박을 받으면서도 유지했던 그 뜨거웠던 사랑도 언제부터인가 식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바른 교리(교훈) 못지 않게 바른 교리에서 나오는 바른 행동이 중요합니다.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계명(綱領-일의 근본이 되는 큰 줄거리, 마 22:37~40)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 사랑, 성도 간에 서로 사랑하는 것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형제사랑으로 증명되며 진정한 형제사랑(이웃사랑)의 뿌리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은 곧 불신 이웃들을 향한 사랑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아마 에베소교회는 믿음의 1세대, 곧 시간이 지나면서 진리의 정통성을 사수하려고 다른 사람들의 신앙을 지나치게 비판하면서 서로간의 불신이 시작되었는 지도 모릅니다. 진리와 사랑의 균형은 언제나 어려운 과제입니다. 진리를 강조하다 촛대는 무엇입니까? 보면 사랑을 놓칠 수 있고, 사랑을 강조하다 보면 진리를 놓칠 수 있습니다. 거룩함을 추구하다 보면 화평을 깨뜨리기 쉽고, 화평을 추구하다 보면 거룩함을 놓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처음사랑을 버린 것은 아마도 다른 무엇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인 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보다 다른 것을 더욱 사랑하게 되고, 성도(이웃) 보다 다른 무엇을 사랑하게 되면 처음사랑은 식어지고 버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이 식어버리게 되면 성도(이웃)에 대한 사랑 역시 식어져 버립니다. 이것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를 바라볼 때 처음사랑을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운 생각이 있습니다. 물론 교회의 일원인 우리 자신의 상태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얼굴 없는 실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저와 여러분같은 한 사람 한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교회의 모습이 주님과 세상 가운데 어떻게 나타날 것인지 결정됩니다.
우리교회가 주님에 대한 처음사랑을 버렸다고 생각하는 증거는 무엇일까요?
저는 일예로 감히 교회가 함께 기도하는 일을 게을리하는 것에 찾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다함께 기도하자는 요청에 반응하지 않는 모습, 마땅히 하나님 앞에 나와 부르짖어야 하는 데 기도하지 않는 모습이 한 부분입니다. ‘알아서 기도하는 데 왜 그러십니까?’라고 말하기엔 무언가 속히 허합니다.
또한 성도(이웃)에 대한 처음사랑을 버렸다는 증거는 무엇일까요?
하나의 예로 다른 성도에 대해 함부로 말하고 평가하는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목장 안에서 혹은 교회 안에서 다른 형제자매에 대해서 험담하고 비방하는 것입니다. 목장 안에서, 교회 안에서 서로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내적인 분열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가 이렇게 처음사랑을 버린 증거가 있다는 것은 가벼운 문제가 아닙니다. 그럴 수 있다고 주님이 봐 주시지 않습니다. 촛대를 옮기시겠다고 엄중히 경고합니다.
그 대답은 처음사랑의 열정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 비밀을 5절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 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그러기 위해서는 생각하고(Remember) 회개하며(Repent) 처음행위를 가져야(Do) 합니다.
❶ 주님과 처음 사랑을 우리는 생각(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처음 주님을 처음 만난 그 때를 기억해야 합니다. 거기서 내가 주님께 드렸던 약속과 결단을 생각해야 합니다. 과거에 예수님 만나기 전 내 삶을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죄의 종이었고, 하나님과 원수되었고, 소망이 없었던 나였습니다. 그런 나를,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노예매매무역을 하다가 예수님께 돌아온 존 뉴턴 목사님(Amaging Grace)의 좌우명이 “너는 애굽땅 종되었던 집에서 너를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출애굽기 20:2 인용)였다고 합니다.
처음사랑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은 지속적인 만남을 통해 자라가게 됩니다. 날마다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매일 그 분의 말씀을 대하고 그 분께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언제부터 내가 처음사랑에서 멀어져 갔는가를 기억해 내셔야 합니다.
❷ 그리고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돌아가는 것입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품으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듯이 내가 있어야 할 그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❸ 처음 행위를 가져야 합니다. 기도의 자리로 가야 합니다. 말씀을 붙잡고 살던 그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섬김과 봉사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무엇보다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뜨겁게 교제하던 그 경건의 자리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그래야 처음사랑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으로 처음사랑을 상실하는 가장 보편적인 원인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큰 일을 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과 처음사랑, 형제(성도)사랑이 뜨거운 교회가 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사도 요한은 요한 일서 3:16에서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고 가르쳤습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요일 4:21)고 말씀하십니다. 사도 요한이 이렇게 형제사랑에 대해 강조하여 가르친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예수님이 마지막 이 땅을 떠나기 전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며 가르쳐 주신 다락방의 교훈을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이런 형제사랑의 실천은 사랑의 구체적인 대상과 마당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형제사랑은 나 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인간관계 속에서 드러납니다. 우리 교회 800여명의 교인들의 촛대는 무엇입니까? 처지를 서로 알고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교회 속의 교회인 목장, 가정교회 안에 들어가 목장식구들을 나의 영적인 가족으로 알고 사랑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사랑은 쇼가 아닙니다. 일회성 이벤트 행사도 아닙니다. 사랑은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목장 안에서 형제사랑을 훈련받고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거기를 떠나면 우리의 인격이 다듬어질 마당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형제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입니다. 주님과 처음사랑, 성도의 처음사랑을 회복하는 장이 되어야 합니다.
전승에 의하면 사도 요한이 밧모섬의 유배에서 풀려나 다시 에베소교회로 돌아왔을 때 그의 모든 설교의 주제는 ‘소자들아, 서로 사랑하라’였다고 합니다.
‘I have a dream(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을 통해 우리에게 큰 감동을 준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연설에서 ‘아직도 세상을 움직이는 힘-그것은 사랑입니다.’라고 말한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바로 그 교회는 그 사랑이 넘쳐 흐르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가 바로 이런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Quotex 플랫폼에 설명된 다양한 차트 유형
선형, 영역 차트
가격 움직임은 선으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영역 및 선형 차트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일본 촛대는 차트를 보고 오늘날 시장 상황을 분석하는 데 사용됩니다.
일본 촛대 차트
일본 촛대
촛대는 특정 기간의 가격 변동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으며 본체와 심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심지와 시체
몸체 테두리는 시가와 종가를 표시하고 심지의 위쪽 및 아래쪽 테두리는 최대 및 최소 가격을 표시합니다.
촛대의 가격 데이터
자산 가격이 촛대보다 높아지면 녹색으로 바뀝니다. 가격이 하락하면 촛대가 빨간색으로 바뀝니다. 5분 촛대에는 이 기간 동안의 가격 변동에 대한 정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동일한 데이터를 촛대는 무엇입니까? 포함하지만 규모는 다른 5분의 기간으로 상상할 수도 있습니다.
5분 촛대에는 5개의 1분 기간의 데이터가 포함됩니다.
막대 차트
막대는 촛대와 비슷합니다.
막대는 동일한 원리로 설계되었습니다. 그들은 수직선과 왼쪽과 오른쪽 두 개의 짧은 수직선으로 구성됩니다. 수직선은 시가와 종가를 나타내고 수직선은 최저가와 최고가를 나타냅니다.
막대 차트의 가격
촛대가 가장 인기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일본 촛대는 전문 상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습니다. 촛대 차트의 가치는 대담한 사용 용이성과 정보의 깊이에 있습니다. 트레이더는 이미지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지표가 가능하지 않은 본격적인 기본 분석 도구를 얻습니다.
2016.01.26 금 촛대 사이에 계신 인자
지난주일 계시록1:4-8절 말씀을 통해서 계시록의 전체의 구조와 중심 주제가 무엇인지를 확인했습니다. 요한계시록이 비록 서신 형식을 띠고 있지만 실은 키아즘(Chiasm, 대차병행구조)이라 일컬어지는 히브리인들의 독특한 문학적 표현 양식에 의해 매우 정교하게 구성된 글임을 살펴보았습니다. 키아즘 구조 하에서 중심 주제는 글의 맨 중앙에 놓여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창이랄 수 있는 서론, 1:4-8절을 살펴보면 중앙에 놓인 6절 하나님 아버지를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 삼으심’이 중심주제입니다. 이 주제는 요한계시록 전체의 주제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계11:15)와 동일합니다.
1:1-8절의 서론에 이어서 오늘 본문 말씀은 ‘세상 나라는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되어 가는가?’ ‘누구를 통하여 이 일이 진행될 것인가?’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살피기에 앞서 요한계시록의 표현적 특징 한 가지를 더 살펴보아야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의 표제인 1:1절,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라는 말씀 중 ‘계시’는 ‘묵시’라고도 번역됩니다. 이 묵시는 히브리인들의 독특한 문학적 표현양식이기도 합니다. 특히 이 묵시문학적 표현은 구약성경 중 에스겔서, 다니엘서, 스가랴서 등, 후기 선지서들에 주로 많이 등장합니다.
콜린스(J. Collins)라는 학자는 묵시문학적 표현 양식을 ‘서사적 골격을 가진 초월성’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서사적 골격’이란 이야기 형태의 전개 과정을 가진 글의 구조를 말합니다. ‘초월’이라는 말은 ‘어떠한 한계나 표준을 뛰어넘음, 경험이나 인식의 범위를 벗어나는 일’을 말합니다. 묵시문학에서는 크게 두 가지 초월성이 두드러지는데 종말적 구원을 조망하는 경우에는 ‘시간적 초월성’으로, 초자연적 세계를 논할 때에는 ‘공간적 초월성’으로 나타납니다. 묵시적 표현 양식은 영화 아바타, 인터스텔라와 같은 SF 영화나 환타지 소설 등에 이용되는 표현기법과 유사합니다. 실은 이들 영화나 소설들이 묵시문학적 양식을 착안ㄹ해서 만든 것입니다. 이들 영화에서는 시공간의 내재에서의 상황과 사건이 있고 이를 손쉽게 뛰어넘는 이동(초월)이 어렵지 않게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묵시문학적 표현의 특징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교회는 시공간의 초월인 ‘하늘과 영원’속에, 즉 하나님 품 안에서 이미 존재해 있고 동시에 ‘지금 여기’에도 존재합니다. 지금 여기 지상에 있는 교회는 시공간적 한계를 비롯한 여러 가지 한계와 연약함 가운데 있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 가운데서 그 어떤 한계와 연약함과 잘못된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완전한 교회를 이루게 될 것을 보여줍니다. 이런 묵시 문학적 표현은 지금 여기의 지상 교회가 장차 하나님의 품안에서 완성될, 아니 이미 하나님 품 안에서 완성된 영광스러운 자신의 모습을 보고 지금 여기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소망과 용기와 확신을 갖게 합니다.
이제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게 하십니까?’ 교회를 통해 이 일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먼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들, 즉 하나님의 통치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모아 교회를 이루시고 그들을 통해 세상 나라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게 하십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을 비롯한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비밀’(20절)입니다. 이 비밀은 사도 요한만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도 에베소서1:17-23, 3:1-11, 골로새서1:9-20절들을 통해 동일한 내용을 전합니다. 이에 대하여 오늘 본문을 통해 좀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촛대는 무엇입니까? 예수를 증언하다가 핍박을 받아 밧모 섬에 유배된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던 요한은 어느 주의 날에 성령의 감동으로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환상을 보고,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렇게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이 본 것은 ‘일곱 금 촛대’(12절)와 그 사이에 임재 해 계시는 ‘인자 같은 이’(13절)입니다. 일곱 금 촛대는 1차적으로는 본문 20절 하반절,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는 말씀과 같이 당시 소아시아 지역에 있던 일곱 교회를 말합니다. 그런데 왜 교회를 ‘일곱 금 촛대’의 상징으로 보여주시는 것일까요? 일곱 금 촛대는 구약성경 출애굽기 25:31-40절에 의하면 성소 안을 밝혔던 일곱 개의 가지를 가진 등잔대를 말합니다. 스가랴서4:2-6절에서 ‘일곱 등잔’은 성전 전체를 표상하는 신실한 이스라엘 공동체에 대한 비유적인 표현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즉 교회를 ‘일곱 금 촛대’로 보여주는 것은 ‘전체로서의 교회’를 표상하는 것입니다. 보편적 교회의 ‘완전함’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구체적인 이름이 언급되고 있는 소아시아에 있는 지상 교회와 대비되는 하늘의 교회 즉 하나님 품 안의 교회가 ‘금’과 같이 귀하고 ‘7’이라는 숫자가 상징하는 것 같이 완전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반면 지상에 있는 교회는 어떻습니까? 다음 주일부터 살펴 볼 계시록 2-3장에 등장하는 일곱 교회 대부분이 주님으로부터 책망 받을 만한 문제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지상의 교회는 과정 중의 교회로서 아직 죄의 오염과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보여줍니다. 지상 교회가 여전히 연약함과 미숙함 가운데 있음을 보여줍니다. 교회는 이것을 자신들의 죄와 허물과 미숙함을 합리화하는 방편으로 삼지 않아야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교회는 이로 인해 낙심하고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실상과 한계는 인정하며 결국은 ‘일곱 금 촛대’와 같이 촛대는 무엇입니까? 완전한 하나님의 교회가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비전과 의지를 지상교회도 품어야 합니다. 그렇게 이루어 가실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를 그렇게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은 교회 된 일곱 금 촛대 사이에 거하시는 ‘인자(人子) 같은 이’(13절) 때문입니다.
일곱 촛대, 즉 교회 사이에 임재 해 계시고 교회의 사자인 일곱별을 오른 손에 붙들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선언하시는 ‘인자 같은 이’는 누구입니까? ‘인자(人子) 같은 이’는 풀어서 말하자면 ‘사람의 아들 같은 이’입니다. 이 표현과 의미 역시 구약성경에서 인유했습니다. 다니엘서 7장에서 다니엘이 본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환상 가운데 등장합니다.
다니엘7:9-10,13-14절을 읽어봅시다. 이곳에 기록된 하늘의 보좌에 않아 계신 신적존재 즉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9,13절)는 영원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그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 앞으로 ‘인자 같은 이’(13절) 즉 ‘사람의 아들 같은’ 신적 존재가 인도됩니다. 그리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로부터 ‘권세와 나라와 영광’(14절)을 부여받습니다. 그에게 위임된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나라(14절)라고 선언합니다. 이 두 번째 신적 존재 즉, ‘사람의 아들 같은 이’, 인자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사람의 아들 같은 신적존재 즉 인자는 ‘네 짐승’으로 비유되는 세상 나라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결국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이 나라를 얻고 그 누림이 영원”하게 하실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나라가 완성되기까지 ‘네 짐승’으로 비유되는 세상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즉 한시적인 기간 동안 고난과 핍박을 받게(25절) 되지만 결국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나라들의 위세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거룩한 백성에게 붙인 바”되고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27절)가 될 것이라고 기록합니다.
오늘 본문의 ‘인자 같은 이’는 바로 구약 다니엘서 7장에 약속된 두 번째 신적 존재, 즉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인자’ 즉 ‘사람의 아들 같은 이’는 예수님이 스스로 자신을 가리키는 예수님의 자기칭호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복음서에서 80여회에 걸쳐 자신을 지칭할 때에 ‘인자’(人子)라고 하셨습니다.
설명이 조금 복잡하긴 했지만 핵심은 이것입니다. 구약성경부터 예언되어 온 메시야, 종말의 구원자,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곱 금 촛대’인 교회에 임재 해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금 촛대 사이에 계시는‘인자’의 모습을 본문 13-16절에서 다양한 상징적 표현들을 통해 자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금 촛대 사이에 있는 ‘인자’의 모습에 대한 표현을 조합해 보아도 인자의 모습이 어떠할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일부 성화에서는 13-16절의 표현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려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묵시문학의 표현의 초점은 어떤 모양인가? 에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찬양하고 있는 인자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과 성품과 영광과 주권과 권세와 능력’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 상징적 표현들의 배경과 출처를 지나치게 집착하고 분석하다보면 오히려 묵시문학의 상징적 표현들에 담긴 고유의 생명력을 훼손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개념과 논리로 묘사 될 수 없는 영광스럽고 거룩하고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종말의 구원자 되시는 ‘인자’,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 된 우리 안에 와 계시고 우리를 붙들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처음과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요 ‘사망과 음부의 권세’(18절)를 가지신 ‘인자’가 교회된 우리 안에 임재 해 계시고(13절) 교회된 우리를 붙들고(16절)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세상 나라는 결국 우리 주 그리스도의 나라가 됩니다. 하나님의 촛대는 무엇입니까? 주권과 능력 가운데 반드시 실현됩니다. 그 과정 중에 요한복음16:33절,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교회, 성도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담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도된 교회 안에 ‘인자’가 임재 해 계시고(13절), 그의 오른 손으로 교회를 붙들고(16절)계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세상 나라’는 ‘인자’되신 예수 그리스도, 처음이요 마지막이시고, 촛대는 무엇입니까? 죽음에서 부활하셨고,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18절)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하나님 나라’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계시의 말씀을 통해 이미 보았고 그 일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몸 된 교회를 통해 이미 지금 일어나고 있고 결국은 장차 완성 될 일이기 때문(19절)입니다. 이 계시의 말씀에 붙잡혀 하나님 나라를 세상에 드러내며 살아가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11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12 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4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15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16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17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18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19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20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촛대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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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혜의 말씀에 힘을 얻고 갑니다
- 은혜 받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 어제 만나뵙게되어 너무도 큰 영광이었습니다 오늘도 본부장님과 통화를 하는데 왜 그리 어제의 오찬장면이 떠오르는지.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눈물이 많은건 알지만 자양동에서 오는 내내 그치질 않더군요. 지금도 그 은혜로운 촛대는 무엇입니까? 자리의 여운이 가시질 않습니다.정말 맛있는
- 야고보서파일대금 입금했습니다. 보내주실메알: [email protected]
- 안녕하세요 inhm09 님. 저희가 월욜에 출근해서 확인 후 발송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신청하신 설교파일 9편, 모두 보내드렸습니다. 감사합니다.
신앙생활에 필수적인 4대 삶 (요한계시록 1장 17-20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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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미션퍼블릭 | 등록일 | 2014-04-01 |
(17절)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18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19절)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20절)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1. 제물이 되는 삶
예수님의 환상을 보고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었습니다(17절). 이 모습은 성도들에게 가장 필요한 모습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잘해야 할 것은 ‘주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는 것, 즉 하나님 앞에 온전한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언뜻 생각하기에 제물이 살아있으면 더 싱싱하고 좋을 것 같지만 제물은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제물이 제단 위에서 활개를 친다면 결코 좋은 모습이 아닙니다.
교회를 ‘하나님의 제단’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제단은 있는데 제물은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제물이 있어도 산 제물은 있지만 죽은 제물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제단 위에 놓인 제물이 살아있으면 하나님은 그 제사를 죽은 제사로 보시고 하나님의 제단 위에 놓인 제물이 죽어 있으면 하나님은 그 제사를 산 제사로 보십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공하는 일’이나 ‘체험하는 일’이 아니라 ‘제물이 되는 일’입니다.
2. 두려움이 없는 삶
예수님의 환상을 보고 엎드러진 사도 요한에게 예수님이 오른손으로 안수하시고 위로의 말씀을 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17절).” 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까? 주님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기 때문입니다(18절). 두려워하는 것은 살인하는 것이나 행음하는 것이나 우상을 숭배하는 것 이상의 죄입니다(계 21:8). 왜 두려워하는 것이 큰 죄입니까? 두려움은 주님을 작게 보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대개 보면 눈이 큰 사람이 두려움도 많습니다. 영적인 의미에서도 ‘눈이 큰 사람’이 두려움이 많습니다. 즉 뵈는 것이 많으면 두려움도 많아집니다. 뵈는 게 없고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쥐신 주님만 보여야 담대해집니다. 사는 것에 지나치게 관심을 두면 제대로 살지도 못하고 두려움에 젖어 살게 되지만 주님을 믿고 죽기를 각오하면 그 가운데 사는 길이 열립니다. 지나치게 살려고 하니까 시험거리가 많은 것이지 죽기를 각오하면 더 이상 죽어야 할 일이나 시험받을 일이 없게 되고 그때 오히려 주님의 지극한 위로와 평강이 넘치게 됩니다.
3. 증거자의 삶
사도 요한에게 위로의 음성을 들려 준 후 주님은 다시 한 번 사도 요한에게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고 하셨습니다. 왜 기록하라고 했을까요? 남에게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처럼 자신이 경험한 진리나 체험이나 환상이나 은혜를 항상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수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것들을 나눔과 증거를 위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 나눔과 증거가 없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것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됩니다.
사도 요한이 본 환상, 즉 요한계시록은 종교적 엑스터시를 추구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종교적 엑스터시를 추구하면 시한부 종말론이 나오고 종말 열병에 빠집니다. 종교적 엑스터시는 가장 영적인 모양을 하지만 가장 영적으로 해로운 것입니다. 종교적 엑스터시는 마약이 주는 엑스터시와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자신이 가진 물질, 재능, 인맥, 지위, 시간 등 모든 것을 활용해 복음 전파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가장 종말론에 관한 말씀을 잘 이해하고 종말을 잘 대비하는 복된 사람입니다.
4. 교회를 사랑하는 삶
요한계시록의 초점은 교회에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교회와 교회의 일꾼들을 붙드시고 보호하실 것입니다(20절). 옛날에는 가난했지만 얼마나 순수하게 교회를 사랑했습니까? 그때는 교회에 대한 사랑과 애정이 대단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한국 교회에 은혜를 주셨습니다. 오늘날 가장 큰 문제는 무엇입니까? 옛날에 비하면 상당히 잘 살게 되었지만 그때보다 계산이 없는 헌신적인 교회 사랑이 크게 약해진 것입니다.
이 민족을 치료하는 길과 우리 영혼을 치료하고 축복 받는 길은 다시 교회 사랑을 다짐하고 실천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다른 모든 문제도 해결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오른손에 붙잡힌 교회의 충성스런 일꾼이 되고 자신을 통해 마지막 때에 주님이 크게 증거되고 영광 받는 꿈과 비전을 가지십시오. 성도가 그렇게 살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바램이 요한계시록의 곳곳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영적으로 어둡고 어려운 터널을 지나고 있습니다. 교회 성장이 많이 힘들어졌습니다. 많은 개척교회들이 문을 닫고 있습니다. 교회의 이미지가 나빠져 전도의 길도 많이 막혔고 심지어는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영적인 큰 가뭄의 시대에 하나님이 크게 쓰시는 인물이 나타났습니다. 그런 인물의 꿈을 가지고 예배하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교회를 섬기고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며 세상에서도 열심히 사심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십시오.
일곱 별과 일곱 촛대의 비밀 1
오늘 본문은 요한이 밧모 섬에서 환상 가운데 예수님을 만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밧모 섬 환상 또는 인자 환상이라고 부릅니다.
당시 요한은 로마 당국에 의해 밧모 섬에 유배되어 있었습니다. 밧모 섬은 에베소에서 가까운데, 에베소 해안으로부터 약 90km정도 떨어진 에게 해의 섬입니다. 그곳은 당시에 주로 로마의 정치범 유배지로 이용되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많은 분들이 요한계시록의 모태가 된 그 밧모 섬을 여행합니다. 에베소 해안에 있는 터키의 쿠사다쉬 항구에서 배를 타고 4시간 정도 가면 그리스의 밧모 섬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거기 가면 요한이 계시를 받았다고 전해지는 동굴교회를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에베소는 당시에는 항구였지만 지금은 강의 토사 때문에 매립이 되어 더 이상 항구가 아닌 내륙 10km 정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밧모 섬의 요한에게 나타나신 날은 주의 날이었습니다. 주의 날은 주일 즉 일요일이죠. 아마도 요한은 주일 날 홀로 예배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만났던 것 같습니다. 요한은 그때 특별한 성령의 임재를 느꼈고 이어서 자신의 뒤에서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음성은 ‘네가 지금 보는 것을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편지하라’는 음성이었습니다.
요한은 몸을 돌이켜 그 음성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때 일곱 금 촛대가 먼저 눈에 들어왔고, 이어서 그 촛대 사이에 거니시는 인자 같은 이를 보았습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셨는데,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었습니다. 이 복장은 지금 나타나신 예수님의 신분이 무엇인지 암시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것을 제사장의 복장이라고 봅니다. 구약 제사장들은 에봇 위에 흉패를 차고 허리에 정교하게 짠 띠를 띠었죠. 제사장들은 그런 옷을 입고 성막이나 성전의 촛대를 돌보는 일을 합니다. 촛대의 묵은 심지나 기름을 제거하고 신선한 기름을 다시 채우고 불을 켜는 것이죠.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런 복장으로 촛대 사이에 계신다는 것은 그분이 지금 제사장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모습을 좀 더 살펴보면, 그분이 단순히 제사장으로만 나타나신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의 머리는 흰 양털 같고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 같고 그의 오른손에는 일곱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는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모습들을 하나하나 살펴볼 수 있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이것이 다니엘서 7장에 나오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에 대한 묘사와 비슷하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보니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그의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의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그의 보좌는 불꽃이요 그의 바퀴는 타오르는 불이며 불이 강처럼 흘러 그의 앞에서 나오며 그를 섬기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서 모셔 선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단7:9~10)
또 이것은 다니엘서 10장에 나오는 천상의 인물과 비슷합니다. “첫째 달 이십사일에 내가 힛데겔이라 하는 큰 강가에 있었는데, 그때에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본즉 한 사람이 세마포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우바스 순금 띠를 띠었더라. 또 그의 몸은 황옥 같고 그의 얼굴은 촛대는 무엇입니까? 번갯빛 같고 그의 눈은 횃불 같고 그의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의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단10:4~6) 그런데 여기서 이 인물이 미가엘인지 인자인지 혹은 누구인지는 불분명하지만, 한 가지 분명하고 중요한 점은 이 인물이 이스라엘을 박해하는 왕들에 대한 심판(단11장의 내용)을 전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촛대 사이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다니엘서에 나오는 이런 모습을 연상케 하는 가운데, 바로 왕이자 심판주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요한에게 나타나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계신 예수님은 제사장의 모습과 왕의 모습을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그분은 왕 같은 제사장, 또는 제사장 같은 왕이신 것입니다.
요한은 그 모습을 보고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었습니다. 그때 그분이 요한에게 오른손을 얹어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이것은 자신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지만, 동시에 지금의 어려운 상황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자신이 처음이요 마지막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달리 표현하면 알파와 오메가라는 말씀으로, 1:8에서 하나님에게 적용되었던 명칭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그것을 자기 명칭으로 쓰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전에 죽었었으나 지금은 살아있는 자라고 하시고, 영원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목적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현실의 고난 가운데 있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요한에게 다시 한번 자신의 계시를 기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오늘 본문 마지막에 좀 특별한 말씀 하나를 더 하십니다. 그것은 일곱 별과 일곱 금 촛대의 비밀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핀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밧모 섬에 있던 요한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분의 모습은 제사장의 모습이었고 또 왕의 모습이었습니다. 그와 같으신 예수님께서는 몇 가지 말씀을 하셨습니다. 첫째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자신이 어떤 분인가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자신의 계시를 기록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일곱 별과 일곱 금 촛대의 비밀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통틀어 이 비밀이라고 하는 ‘뮈스테리온’은 모두 4번이 등장합니다. 그 중 두 번은 좋은 비밀이고, 두 번은 나쁜 비밀입니다.
첫 번째는 지금 우리가 살펴보는 일곱 별과 일곱 촛대의 비밀이고,
두 번째는 일곱 번째 나팔이 울릴 때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비밀(10:7)이고,
세 번째는 음녀의 이마에 기록된 비밀(17:5)이고,
네 번째는 그 음녀와 그가 탄 짐승의 비밀(17:7)입니다.
그래서 17장에 나오는 음녀 및 짐승과 관련된 나쁜 비밀을 제외하면, 물론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도 알아야 하겠지만 촛대는 무엇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의도하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요한계시록의 비밀은 단 2개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점에서 1:20이 말씀하는 일곱 별과 일곱 촛대의 비밀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비밀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그것에 대한 한글 번역을 잠깐 살펴보고자 합니다. 1:20절을 자세히 보신 분들은 발견하셨겠지만, 개역개정 성경은 이것을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라고 번역하고 있죠. ‘일곱 별과 일곱 금 촛대의 비밀이라’로 하지 않고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일곱 별은 비밀이지만 일곱 촛대는 비밀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개역개정 번역이 그런 이유는 헬라어 원문을 직역했기 때문인데, 별과 촛대 사이에 쉼표가 있는 등 원문의 모습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 초기 사본에는 대부분 쉼표나 마침표 등이 없고 엑센트나 띄어쓰기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성경 기록의 측면만이 아니라 그 내용으로 보아도, 일곱 별은 비밀이지만 일곱 촛대는 비밀이 아니라고 하면 좀 이상합니다. 별과 촛대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별보다 촛대가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20절 후반절도 별은 어떤 의미이고 촛대는 어떤 의미인지 설명하는 것을 보더라도 별과 촛대가 함께 하나의 비밀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래서 개역개정 외 다른 한글 성경들은 모두 일곱 별과 일곱 촛대의 비밀이라고 하고 있고, 영어 성경도 상당수 그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일곱 별과 일곱 촛대의 비밀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비밀이 무엇일까요? 일곱 별과 일곱 촛대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일곱 별은 무엇이고 일곱 촛대는 무엇이라는 비밀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20절 후반절이 그것을 바로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 즉 그 교회를 대표하는 천사들이고, 일곱 촛대는 그 일곱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뭐가 비밀일까요? 정체가 비밀이 아니라면, 뭐가 비밀이라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 정체의 의미가 비밀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별이 천사를 가리키고 촛대가 교회를 가리키는 것이 비밀이 아니라, 교회의 의미가 비밀이고 교회를 대표하는 천사의 의미가 비밀이라는 뜻입니다. 네,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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